1900
1904
1905
선교 목적으로 일본인 최초 이주
수원역 일대 신작로를 중심으로 일본인 상권형성
경부철도 개통
수원역은 1905년 경부선의 3급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는데, 수원역 개통 이후 역 주변 지역이 개발되고 수원화성과 수원역을 잇는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출처: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 폐쇄과정 백서> 2021, 수원시 여성정책과

제공: 수원박물관
1906
수원 서호 옆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설치 / 일본인의 토지겸병 및 지주들의 대규모 농장경영 시작
조선 내 일본인 거류지역에 유곽이 설치되어 운영된 데 비해 수원에는 유곽이 공식적으로 설치되지 않았다. 수원에 일본인이 최초로 들어온 것은 1900년으로 경성이나 인천에 비해 다소 늦은 편이다. 수원으로 일본인 이주가 본격화한 것은 1903~1904년 경으로 수원에 식민농정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인 농학자들을 파견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수원에 권업모범장이 설치되고 동산농사주식회사 국무농장,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본인 회사들의 농장이 대규모로 설치되면서 수원은 일본인들의 주요 농업 이주지로 성장하였다.
가족 단위 농업 이주자를 중심으로 설립된 수원 일본인 사회는 남성 단신 이주자가 많았던 부산, 경성, 인천, 원산 등지의 일본인 이주 지역에 배해 상대적으로 성매매 업소와 유곽이 발달하지 않았다. 즉 초기 일본 이주 지역에 비해 수원의 일본인 사회는 상대적으로 성구매 수요가 크지 않았다.
출처: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 폐쇄과정 백서> 2021, 수원시 여성정책과
1907
관기제도 폐지
1908
‘기생 및 창기 단속력’ 제정 / 수원기생조합소 조직 (1925년 화성권번으로 인가)
1908년 9월 ‘기생 및 창기 단속령’이 제정되면서 일제는 경시청에 의해 모든 기생들이 기생조합에 가입하여 영업 허가를 받아야만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이때부터 기생들은 식민지배의 통제 아래에서 감독과 관리를 받으며 상업적 기생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식민지 통제 속에 수원기생조합이 만들어졌는데 1910년대 초반으로 보이며 공식명칭은 ‘수원예기조합(水原藝妓組合)’이었다. 수원예기조합은 수원면 남수리에 있었는데 지금의 화홍문 아래 수원천을 따라 있는 남향동 일대이다.
출처: 수원박물관 홈페이지
1916
대좌부창기취체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 제정 / 일본의 공창제 도입
1919
수원예기조합 김향화 주도 30여명의 기생 대한독립만세운동 참여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 일어났다. 당시 화성행궁 봉수당을 사용했던 자혜의원으로 건강검진을 갔던 김향화와 30여명의 기생들은 자혜의원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자혜의원 앞에는 수원경찰서가 있어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차고 근무하고 있었으나, 김향화와 수원기생들은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당시 꽃다운 나이 스물셋의 기생 김향화는 기생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들을 이끌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2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에 처해져 옥고를 치렀다. 재판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하여 김향화의 의로움을 지켜보았다.
출처: 수원박물관 홈페이지(수원의 인물)

제공: 수원박물관
1920년대
수원화성 인근에 일본인 요릿집 8개소 존재
1920년대 수원 거주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요릿집 8개소가 확인된다. 이 업소들은 화성 주변에 몰려있는데 관공서가 몰려 있는 성안 상권과 조선인 중심의 남문 상권이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원역 일대 일본인 상권이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화성 주변 상권이 사업적으로 유리했던 것이다. 이들 요릿집은 수원 기생들을 통해 영업하고 업소를 운영할 수 있었다.
출처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 폐쇄과정 백서> 2021, 수원시 여성정책과
1931
수려선 개통 / 경기도 내륙의 곡창지대와 경부철도 연결

관광의 고도 수원(1936) 1936년에 제작된 수원관광안내 채색지도 엽서 제공: 수원박물관
1937
수인선 개통 / 여주, 이천의 쌀과 서해안의 천일염 약탈의 목적으로 건설
1930년대부터 수원역을 중심으로 경부선, 수인선, 수려선이 종횡으로 연결되며 교통체계가 대폭 확충되었다. 사통발달의 요충지인 수원역을 이용하는 화물과 여객이 많이 늘어나서 수원역은 물산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해 갔다.
출처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 폐쇄과정 백서> 2021, 수원시 여성정책과

1930년대 수원역 내부
1940년대
일본인, 조선인, 중국 화교 등이 운영하는 다양한 형태의 업소 증가 / 접대부 고용하여 성매매를 하는 술집 등장
1930년대 후반 경성, 개성, 인천, 수원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찻집, 요릿집과 선술집이 늘어나면서 유흥업이 크게 확산되었다. 수원 유흥업소들은 합법적으로 허가를 받고 활동하는 예기들을 두고 운영하는 요리집과 고녀(雇女)라고 하여 접대부를 고용하여 운영하는 선술집, 찻집, 음식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942년에는 10개소의 요리점, 82개소의 선술집과 음식점이 운영되었다.
출처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 폐쇄과정 백서> 2021, 수원시 여성정책과

선술집과 음식점이 모여있던 향교로 제공: 수원박물관
1945